블록체인 논의, 가상자산을 넘어 금융 인프라 경쟁으로 이동한다
페이지 정보
본문
블록체인, 가상자산을 넘어 금융시장 디지털화의 핵심 인프라로 부상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토크노미코리아 2026’에서 블록체인과 전통 금융의 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메시지가 나왔다. 핵심은 가상자산을 기존 제도 안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넘어, 금융시장의 운영 방식 자체가 디지털 기술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셉 샬롬 샤프링크 최고경영자(CEO)는 이번 기조연설에서 블록체인을 단순한 투자 자산의 기반 기술로 보지 않았다. 그는 주식, 펀드, 채권, 결제, 담보 관리 등 금융시장을 움직이는 여러 기능이 앞으로 온체인 환경과 결합할 가능성에 주목했다.
샤프링크는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으로, 이더리움 기반 재무 전략을 주요 방향으로 내세우고 있다. 샬롬 CEO는 과거 블랙록에서 장기간 디지털자산 전략을 담당한 인물로,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현물 ETF, 스테이블코인 관련 사업 경험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력 때문에 그의 발언은 단순한 업계 전망보다 전통 금융권의 변화 흐름을 반영한 신호로 해석된다.
금융시장의 오래된 문제, 결제 지연
샬롬 CEO가 강조한 문제의 출발점은 금융시장의 비효율이다. 오늘날 증권 거래는 매매가 체결됐다고 해서 즉시 모든 절차가 끝나는 구조가 아니다. 실제 자금과 증권이 오가는 결제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 시장은 거래 다음 날 결제가 이뤄지는 T+1 체계를 적용하고 있고, 한국은 일반적으로 T+2 구조를 사용한다. 이 짧은 시차는 겉으로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대규모 금융시장에서는 상당한 비용을 만들어낸다.
거래가 체결된 뒤 최종 결제 전까지는 상대방이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금융기관들은 이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별도의 담보와 유동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 결과 실제 생산적 투자에 쓰일 수 있는 자금이 정산과 위험 관리 과정에 묶인다.
샬롬 CEO는 블록체인 기반 토큰화가 이러한 구조적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이라고 봤다. 자산의 소유권과 거래 내역이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결제가 자동화될 경우 기존 후선 업무의 상당 부분이 간소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토큰화의 의미는 ‘디지털 포장’이 아니다
토큰화는 기존 자산을 블록체인 위에서 거래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기술이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전통 자산에 디지털 껍데기를 씌우는 작업으로 이해하면 부족하다.
토큰화의 본질은 자산의 발행, 이전, 보관, 결제, 권리 확인 방식을 하나의 디지털 네트워크 안에서 처리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금융상품은 더 작은 단위로 나뉠 수 있고, 거래는 더 빠르게 처리될 수 있으며, 조건에 따라 자동으로 실행되는 구조도 가능해진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러한 변화가 이미 시장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법정화폐 가치에 연동된 디지털자산은 국경을 넘는 송금, 거래소 간 결제, 온체인 금융 서비스에서 빠르게 활용되고 있다. 샬롬 CEO가 스테이블코인을 성공적인 토큰화 사례로 언급한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토큰화 자산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지만, 적용 범위는 점차 넓어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머니마켓펀드, 국채, 사모펀드 등 일부 상품이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상장 주식과 공모 금융상품까지 논의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거래소와 예탁기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큰화가 실험 단계에만 머물러 있다면 시장의 관심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근 변화는 전통 금융 인프라를 담당하는 기관들까지 이 흐름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미국 주요 거래소들은 거래시간 확대와 디지털 자산형 증권 거래 체계를 검토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주식시장이 특정 시간에만 열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더 긴 시간 동안 거래되는 구조로 바뀔 가능성도 거론된다.
예탁결제기관 역시 토큰화된 담보와 자산 기록 방식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금융시장의 뒤편에서 결제와 소유권 확인을 담당하던 영역이 블록체인 기술과 연결되면, 자본시장의 운영 모델은 지금과 달라질 수 있다.
최근 일부 디지털자산 기업들이 주주명부 관리와 이전대행 업무에 진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블록체인 기업들이 단순히 코인 거래에 머물지 않고, 기존 자본시장의 핵심 기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더리움이 주목받는 이유
샬롬 CEO는 여러 블록체인 중에서도 이더리움의 역할을 높게 평가했다. 이더리움은 스마트계약 기능을 바탕으로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는 네트워크다. 단순한 가치 이전을 넘어, 조건부 거래와 자동화된 금융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다.
이더리움 생태계에는 스테이블코인, 탈중앙화 금융, 토큰화 자산, NFT, 레이어2 네트워크 등 다양한 응용 분야가 형성돼 있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이미 많은 개발자와 사용자, 자산이 모여 있는 네트워크라는 점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물론 이더리움이 모든 금융 인프라를 독점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규제, 확장성, 수수료, 보안, 기관용 프라이버시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샬롬 CEO가 이더리움을 미래 금융의 주요 기반으로 언급한 것은, 현재까지 가장 넓은 온체인 금융 생태계를 갖춘 네트워크 중 하나라는 점과 관련이 깊다.
스테이블코인은 통화 경쟁의 도구가 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논의는 기술이나 투자 상품의 범위를 넘어 통화 전략과도 연결된다. 특히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온체인 결제의 표준처럼 사용될 경우, 미국 달러의 영향력은 디지털 금융 영역에서도 강화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이용자가 맡긴 준비자산을 관리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미국 국채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커질수록 미국 국채 수요와 달러 결제망의 영향력도 함께 커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주요 국가들은 자국 통화 기반 디지털 결제 수단을 고민하고 있다. 홍콩, 싱가포르, 일본 등이 스테이블코인 제도 정비에 속도를 내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온체인 금융시장이 성장했을 때 모든 결제가 달러 중심으로 흘러가면, 각국의 통화 주권과 금융 경쟁력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이 흐름을 단순히 해외 가상자산 시장의 변화로만 볼 수 없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토큰증권, 디지털자산 보관, 온체인 결제 인프라 등은 향후 국내 금융산업의 경쟁력과 연결될 수 있는 분야다.
규제는 막는 장치가 아니라 시장 설계의 기준이 돼야 한다
샬롬 CEO는 규제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투자자 보호는 금융시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원칙이다. 그러나 보호만을 이유로 새로운 기술의 활용을 지나치게 제한하면, 자본과 인재가 더 명확한 제도를 갖춘 국가로 이동할 수 있다.
디지털자산 산업에서 규제 공백은 위험을 키우지만, 과도한 불확실성 역시 기업 활동을 위축시킨다. 기업은 어떤 서비스가 허용되는지, 어떤 방식으로 라이선스를 받아야 하는지, 투자자 보호 기준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있어야 장기 투자를 결정할 수 있다.
한국은 기술 인력과 디지털 금융 수요가 풍부한 시장이다. 따라서 명확한 규칙과 혁신 친화적 제도가 함께 마련된다면, 토큰화 금융과 블록체인 결제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여지가 있다.
AI 에이전트와 블록체인의 접점
이번 연설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AI와 블록체인의 결합이다. 생성형 AI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앞으로는 사람이 직접 명령하지 않아도 AI 에이전트가 일정한 범위 안에서 금융 행동을 수행하는 환경이 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AI 에이전트가 사용자의 현금을 더 높은 수익률의 계좌로 옮기거나, 투자 비중을 조정하거나, 서비스 이용료를 자동으로 결제하는 방식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빠르고 저렴한 결제, 자동 실행, 소액 단위 거래가 중요해진다.
기존 결제망은 사람 중심의 거래에는 적합하지만, 수많은 AI 에이전트가 초고빈도로 소액 거래를 주고받는 구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블록체인과 스테이블코인 결제망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후보로 거론된다.
글로벌 결제사와 핀테크 기업들이 스테이블코인 결제, 가상카드, 초소액 결제 인프라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AI 에이전트 경제가 현실화될 경우, 블록체인은 자동화된 거래를 처리하는 결제 레이어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가상자산 논쟁에서 금융 시스템 논쟁으로
샬롬 CEO의 발언은 블록체인 산업의 논의 축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비트코인 가격, 거래소 규제, 투자자 보호 문제가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결제 효율성, 자산 토큰화, 통화 경쟁, AI 기반 자동화 금융으로 논의가 확장되고 있다.
이 변화는 가상자산 시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주식시장, 자산운용사, 은행, 결제사, 예탁기관, 규제당국 모두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구조적 변화다.
블록체인이 당장 기존 금융을 대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금융시장의 일부 기능이 온체인 방식으로 이동하는 흐름은 이미 시작됐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국가와 기업이 이 변화를 먼저 제도화하고, 안정적인 인프라로 연결하느냐다.
한국 금융시장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변화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 글로벌 디지털 금융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 반대로 명확한 제도와 기술 실험의 공간을 마련한다면, 토큰화와 온체인 금융 분야에서 새로운 성장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결국 블록체인의 핵심 가치는 투기적 자산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더 빠른 결제, 더 낮은 비용, 더 투명한 소유권 기록, 더 자동화된 금융 서비스를 가능하게 하는 인프라에 있다. 이번 샤프링크 CEO의 발언은 그 방향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다.